논산 일지총 등록일 24-10-27 22:32 작성자 성관용 (112.♡.255.216)
본문
매죽헌 성삼문
≪생애 초반≫
1418년 성삼문은 충청남도 홍주(洪州, 현재의 홍성군) 홍북면 노은동(魯恩洞)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를 막 낳으려고 할 때에 공중에서 하늘이 “낳았느냐?”라고 세 번 묻는 소리가 났으므로 하늘이 세번 물었다 하여 그의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이름을 지었다 한다.
형제로는 동생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이 있다.
.[1]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이후 관직에 올라 집현전의 학사의 한사람으로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이때 뒷날 생사를 같이 한 하위지가 그의 과거 급제 동기생이다. 집현전학사로 뽑힌 뒤 수찬을 지냈다.
관료생활 초기,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신숙주와 함께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2][2]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신숙주와 함께 13 차례나 요동에 다녀오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 시절≫
집현전과 훈민 정음
집현전, 훈민정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귀국 후 집현전수찬을 거쳐 직집현전을 지냈다. 1442년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한양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세종의 명으로 신숙주와 함께《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세종대왕이 정음청(正音廳)을 설치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이개(李塏), 최항 등과 함께 참여했다. 가장 공이 컸는데 세종의 명으로 당시 성균관 주부로 재직 중 집현전 교리 신숙주, 행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마침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찾아가게 된다. 13번이나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여 음운(音韻)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또한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는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학자들을 만나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해와 이를 보고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1447년 중시(重試)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료 생활≫
1447년 경연시강관(侍講官), 사간원 우사간,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그 후 왕명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편찬하는데 참여하였고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세종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신숙주·최항·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2][2] 이후 예조 참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와 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세종은 병약한 세자(문종)도 오래살지 못할 것을 예견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을 불러서 어린 원손 홍위(후일의 단종)를 부탁한다는 유지를 여러 번 남겼다. 성삼문 역시 집현전 학사로 그의 유지를 받들게 되었다.
≪정치 활동≫
계유정난 전후
계유정난, 황표정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53년(단종 1)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를 사살하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에게 정난 공신(靖難功臣)에 책록한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기 위해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학사 36명과 함께 그를 집현전 관원으로서 직숙(直宿)한 공이 있다고 하여 공신의 칭호를 받았다. 모두들 순번으로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이 연회를 베푸는데 참여하지 않았다. 1453년(단종 1년) 사간원좌사간, 1454년 집현전부제학,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다. 1455년 여름에 동부승지가 되었다.
단종의 양위 직후 세조 찬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양위로 즉위하자 그는 이를 찬탈로 규정했다. 왕위에 오르니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국새(國璽)를 안고 통곡하였다. 성삼문은 "국새(國璽)는 옮겨졌지만 주상(主上)이 아직 계시고 우리가 있으니 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하면 그때 죽어도 늦지 않다"며 단종복위운동을 결심했다. 그리고 이후 받은 녹봉은 월별로 표시하여 취하지 않고 집 근처의 곡간에 별도로 쌓아두고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할 때 신숙주에게 참여를 요청하였지만 신숙주는 비현실적이라며 참여를 거절한다.
한편 신숙주는 사육신 중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단종 복위 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긴 하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3][3] 그러나 신숙주는 자신을 위협할 세력을 보낼 것을 미리 감지하고 은신해 있었다.
≪세조와의 갈등≫
육조직계제, 의정부 서사제, 성리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수양대군의 집권과 권력 장악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양대군의 특별 배려로 그는 집현전의 다른 학사들과 함께 등용되고 그의 자문역할로서 배려를 받았지만 그는 수양대군의 왕권 강화 정책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단종의 복위를 역설했고 집현전 학사들과 조정의 신하들 중 일부는 그의 결의에 동조했다. 성삼문과 집현전 학사들이 복위운동에 나섰던 것은, 단종에 대해 충절을 지킨다는 유교적 명분이 있었지만, 그는 세조의 독단에 반대했고 관료지배체제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기에 세조의 독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세조가 즉위 직후부터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는 등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조치를 취하자 집현전 출신 유신들은 크게 반발했다.
≪거사와 최후≫
단종 복위 운동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단종 복위 운동은 그를 포함하여 집현전 출신 관료들과 그 주변 무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세조 부자를 죽이거나 거병을 하면 각지에서 호응할 계획도 세워놓았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 박중림(朴仲林), 박팽년, 김문기, 권자신(權自愼), 금성대군, 이개, 유성원, 윤영손(尹鈴孫), 김질(金礩) 등과 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세조의 반정에 반대하여 외부로 나가거나 사퇴한 전직 관료들과도 연락하였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명나라 사신이 한성부에 도착, 바로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향응을 베풀기로 한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왕의 운검(雲劒, 큰 칼을 들고 왕을 시위하는 것)을 맡은 성승과 김문기로 하여금 세조와 의경세자 부자 및 그 측근을 처치하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누군가에 의해 한명회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사 당일 이들의 움직임을 이상하게 본 한명회와 신숙주의 권고로 세자와 운검의 입장이 폐지되자 성삼문은 거사를 중지하고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계획에 갑자기 차질이 생기자 거사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 한 김질은 전부터 이를 알고 있던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권고와 회유로 이를 세조에게 이를 밀고하였다. 바로 성삼문은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의금부에 체포, 투옥되었다.
≪단종 복위 실패와 투옥≫
아버지 성승·박팽년 등과 같이 상왕(上王 :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일에 착오가 생겨 세조의 직접 심문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김문기와 함께 군기시(軍器寺)(지금의 태평로 근처)에서 처형되었으니 이를 사육신이라 한다.
사형에 임하여 그는 죽기 전에 시 한수를 지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처음에 그들은 명(明)나라의 사신이 왔다가 돌아가는 송별연회 석상에서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정인지·권남 등 일파를 없애버리기로 하였다. 그러나 연회 당일, 세조는 갑자기 자리가 좁으니 운검(雲劍)은 그만두라고 지